읽기는 했는데

속삭임 우묵한 정원

에뷔테른느 2025. 3. 30. 22:44

속삭임: 그게 뭐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미래를 앞서 간다고 해도 말이다.


[어린 시절은 마치 잠과 같았다.]

[그건 항상 나 자신이 무언가의 종말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는 탓이다. 나는 종말을 주시한다. 종말에 매달린다. 그럼으로써 종말에 참여한다. 종말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비밀의 혁명가일 것이다.]

[여행가방 싸기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여행의 목적에 상관없이, 여행의 기간에 상관없이, 그리고 가방 안에 무엇을 넣는지도 상관없이, 설사 텅 빈 가방만 들고 길을 떠나게 될지라도, 가방 싸는 일은 자신에게 담보된 시간을 반드시 채우고야 만다.]

[하나의 얼굴이란 없다. 오직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포착된 하나의 표상이 있을 뿐이다. 얼굴이란 수많은 계보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나를 낯설어한다. 그것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얼굴은 나를 떠나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거리를 유지하며 산다.]

[아마도 나는 궁극적으로 떠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여행을 추상화하고, 그 여행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운명적인 한 발을 내디디는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것을 가만히 바라볼 기회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지 못할 그 무엇을, 나는 시선에 담을 것이다. 그런 다음, 만약 그 바라봄이 충분하다면, 나는 이미 스스로 그 운명을 선택했으며 그 운명을 겪었고, 마침내 지나왔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내 여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우선 그것을 보지 않으면서 시선에 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유리창 밖으로 시간이 흐른다. 외면하면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좌절되거나 취소되거나 잊히거나 거부되거나 포기되거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아예 시도조차 없을 것이다. 오직 그럼으로써만 완성되는 모종의 사건이 있다. 마치 추상적인 집과 같이. 그게 내 미래를 결정짓는 유일한 내용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보지 않으면서 보는 여행의 시작이 될 거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간 미래를 앞서 가졌다.]

[침대 곁 탁자에 놓인 사물들, 책과 그림 도구, 흘러내린 우유가 말라붙은 그릇, 금이 간 흰 항아리의 측면을 비추는 단단하지만 희박한 빛, (속삭임: 개의 이빨, 사슴의 몸통에서 갓 꺼낸 덥고 끈적한 밝은색 내장, 신선한 핏방울. 신선하는 부패 했든, 색으로 이루어진 우리는 모두 광채를 뿜는 사물이다) 물감을 푼 흰색 접시, 주머니에서 막 꺼낸 한 통의 구겨진 편지, 솔로몬의 노래를 베껴 쓰던 펼쳐진 노트, 뭉툭하게 닳아버린 연필, 낡은 수건과 흰 양말 한 짝과 같은 생활의 잡동사니, 그리고 상아 손잡이가 달린 물감을 긁어내는 도구 위로 반투명한 유리창을 통과한 빛이 얇지만 무거운 음영을 만들었다. (속삭임: 금속 성의 광채를 만들어내는 색이다. 은밀한 빛이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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