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했는데

끌로드가 쓴 소설

에뷔테른느 2025. 12. 15. 13:18

# 차원의 경계

2147년, 차원 이동 기술이 상용화된 지 20년이 흘렀다. 3차원 지구와 4차원 공간 사이에 '차원문'이 열렸고, 처음엔 학술 교류로 시작된 관계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는 여전히 낡은 증오가 꿈틀대고 있었다.

"요즘 4차들이 너무 많이 넘어오는 거 아냐?" 정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에도 4차 직원 뽑았다던데. 솔직히 불공정하잖아. 얘네는 시간축을 따라 움직일 수 있으니까 업무 효율이 당연히 높지."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안 맞아. 얘네는 동시에 여러 시간대에 존재할 수 있으니까 우리 같은 '순수 3차원' 사고방식을 이해 못 해. 우리끼리 살아야 해."

"내가 보기엔," 재희가 끼어들었다. "4차들은 타고난 게 달라. 우리랑 섞이면 안 돼. 차원 간 결혼도 금지해야 한다고 봐. 애들은 어떻게 키워? 3.5차원? 정체성 혼란만 올 거야."

카페 구석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존재가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30대 남성이었지만, 그는 4차원 존재 '이안'이었다. 그는 3차원 공간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며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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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정수는 회사에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작성한 파일이 자꾸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무슨 일이지?" 정수가 당황하고 있을 때, 옆 자리의 새 동료가 다가왔다. 어제 그 4차원 존재, 이안이었다.

"도와드릴까요? 아, 이건 시간축 오류네요. 파일이 과거와 현재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이안이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차원을 따라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이 공중에 궤적을 그렸다. 순식간에 파일이 안정화되었다.

"고... 고맙습니다." 정수는 얼떨결에 인사했다.

"별말씀을요. 저도 3차원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많이 겪었거든요." 이안이 미소 지었다. "여기선 '지금'만 존재하니까 답답하더라고요. 마치 여러분이 2차원 평면에 갇힌 것처럼요."

정수는 순간 멈칫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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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정부는 '차원 순혈주의자' 단체의 시위를 진압했다. 그들은 4차원 존재들의 입국을 금지하고 차원문을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뉴스에서 시위 장면이 나왔다. "3차원이 최고다!", "4차들은 돌아가라!"

민호와 재희도 그 시위에 참여했다. 하지만 정수는 나가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안과 함께 일하면서 그는 깨달았다. 4차원 존재들도 자신들만의 어려움이 있었다. 3차원에선 자신의 능력을 제한해야 했고, 끊임없이 '우리와 다르다'는 시선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일부는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날 저녁, 정수는 이안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저번에 한 말... 미안합니다."

"들으셨어요?" 이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 부끄럽네요. 제가 당신들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건 당연해요." 이안이 말했다. "여러분은 3차원만 보니까요. 우리가 4차원에서 보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제한된 존재로 보이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정수의 눈을 바라봤다. "우리 모두 각자의 차원에서 온전한 존재라는 거예요. 어느 쪽이 우월하거나 열등한 게 아니에요."

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두려워한 건 4차원 존재들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다름' 그 자체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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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0년, 청담동 그 카페는 여전히 영업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엔 3차원 존재와 4차원 존재가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민호와 재희는 여전히 시위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정수는 이안과 함께 차원 간 이해 증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증오는 무지에서 시작되고, 이해는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차원에 살든, 모든 존재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

**에필로그**

5차원 존재들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온 건 그로부터 10년 후였다.

정수는 뉴스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와 이안이 만든 단체는 이미 5차원 존재들과의 대화 채널을 열고 있었다.

변화는 느리지만, 분명히 오고 있었다.

한 번에 한 차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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