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했는데

감정의 문화정치

에뷔테른느 2025. 11. 16. 14:50

고통, 증오, 두려움, 혐오, 수치심
사랑, 퀴어, 페미니즘, 정의
.
그러니까 감정은 정치라는 이야기지.
모두들 어렵게 읽었기를,


[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보상 문화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상 문화는 모든 피해가 유무죄를 따지는 문제와 연관된다고 간주하고, 피해에 대한 책임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물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 법은 고통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상태로 바꾸고, 이는 보상을 요구하는 근거로 쓰인다. 상처를 물신으로 만드는 일이 문제인 이유는 서로 다른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전제한다는 데 있다. 모든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가정할 때, 피해는 자격의 문제가 된다. 모두가 피해를 겪은 당사자로서 똑같은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규범적 주체가 피해의 서사를 통해 보호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국가 담론에서 백인 남성 주체는 피해를 겪은 집단이 된다. 국가를 타자에게 개방함으로써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주체가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국 더 많은 특권을 지닌 주체가 피해의 서사를 더 많이 활용하게 된다. 즉 공적 자원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주체일수록 공적 영역에서 피해의 서사를 활용할 역량도 더 많이 지닌다.]

[ 이와 같은 서사는 상상된 타자로 인해 위협을 받는 주체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통해 작동한다. 타자가 주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타자가 주체의 소유물(일자리, 안전, 건강)을 빼앗아갈 뿐만 아니라 주체의 자리마저 대체할 것이라는 위협으로 의미화된다. 상상된 타자의 존재는 주체가 사랑하는 대상 역시 위협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서사는 백인 주체가 “이 땅을 일궜다”라는 환상을 통해 (이주자나 노예 등) 타자의 노동을 감추는 방식으로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간다.2 백인 주체는 “잔인한 정부”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의 위치와 주인의 자리(“우리나라 해안가”)를 동시에 주장한다. 결국 국가를 ‘빼앗는 타자’, 더 나아가 역사를 빼앗고 미래를 빼앗는 타자에게 백인 아리아인이 증오를 느끼는 이유는 국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서사가 완성된다.]

[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감정은 타자가 가까이 있는 상태에 대한 반응이며, 감정이 반응하는 방식은 타자의 본질적 특성에 기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자가 사랑스러워서 타자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며, 타자가 혐오스러워서 타자를 증오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 또는 타자와의 정동적 마주침은 대상과 타자에게 어떤 속성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주체에게 타자와 구분되는 정체성(‘진짜 피해자’ 혹은 ‘위협받는 국가’ 등)을 ‘부여한다’.]

[ 로드는 “이상한 것이 닿지 않도록 그와 똑같이” 방한복을 가까이 잡아당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것’은 바퀴벌레가 아니었다. 로드는 “그가 옷이 닿는 게 싫었던 것은 바로 나”였음을 깨닫는다. 백인 여성의 옷에 닿지 말아야 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가 아니라 로드 자신이었다. ... 로드의 몸은 더러움, 오염, 사악함 등 기존에 바퀴벌레에 달라붙은 특성을 ‘떠맡음’으로써 증오의 대상이 된다. 특정한 타자가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는 과정은 과잉결정된다. 즉 단순히 누구나 증오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연상 작용을 구조화하는 과거 역사는 마주침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마다 다시 작동하며, 이에 어떤 몸과 마주치는 경험은 이미 더욱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 증오받는 몸은 증오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증오받는 사람에게도 증오의 대상이 된다.]

[ 어떤 표현이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활용되다 보면 그 ‘활용’이 표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된다. 일종의 기호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결국 동성관계는 이성 결합의 모습을 흉내 냄으로써 자신들이 살아낼 수 없는 관계의 형태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 공인된 ‘진실’에 맞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페미니스트는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는 한다. 페미니스트는 이성이나 공정함처럼 ‘올바른 판단’의 바탕을 이룬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이들이 된다. 원래부터 병리적일 만큼 ‘감정적인 상태’를 띠는 여성성이 페미니즘으로 이어졌다고 이야기될 때, 페미니즘을 ‘적대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들어가는 글〉에서 이야기한 사고와 감정의 위계를 작동시킨다. 사고와 감정의 위계는 어김없이 주체 사이의 위계로 옮겨진다. 사고와 이성은 남성 주체 및 서구 주체와 연결되고, 감정과 몸은 여성성 및 인종적 타자와 결부된다. 감정을 타자의 몸에 투사하는 것은 타자를 사고와 합리성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사고와 이성에 존재하는 감정적이고 체현된 측면을 감추는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이 책 전체에서 내가 논의한 것처럼 이 세계의 ‘진실’은 감정에 기대고 있다. ‘진실’은 감정이 주체를 움직이고 서로 달라붙게 만드는 일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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