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마크 피셔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기다렸던 year zero는 오는 걸까.,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청년들이 더 이상 놀라움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자본주의는 정교한 의례나 상징 수준에서 믿음이 무 너진 뒤 남겨진 무엇이다. 이제는 그 폐허와 유물 사이를 터벅터벅 걷는 소비자 구경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빈틈없이 장악하고 있다. 제임슨은 자본주의가 무의식에 스며드는 방식을 두려움 속에서 전하곤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식민화해 왔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 이상 논평할 가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프로파간다와 달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옹호하지 않으며, 자본의 작동이 어떤 주관적인 믿음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프로파간다 없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누군가가 옹호하지 않더라도 완벽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 더 잘 굴러갈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과도하게 추상적인 비인격적 구조며 동시에 우리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본에 대한 가장 고딕적인 묘사가 가장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자본은 모종의 추상적인 기생체, 만족을 모르는 뱀파이어이자 좀비-제조자다. 그런데 자본이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살아 있는 육신은 우리의 육신이며, 그것이 만들어 내는 좀비는 바로 우리다. 어떻게 보면 정치 엘리트들은 실제로 우리의 하수인이 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초라한 서비스는 우리의 리비도를 세탁하는 것, 우리의 부인된 욕망들이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 그것들을 우리 앞에 친절하게 재현하는 re-present 것이다.]
[끝없는 관료주의적 미로라는 카프카의 연옥 같은 풍경은 소비에트 체계가 일종의 '기호의 제국'이었고 스탈린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포함한 노멘클라투라 자신들조차 사회의 복잡한 기호학적 신호들을 해석하는 데 몰두했다는 지젝의 주장과 공명한다. 어느 누구도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에 개인들은 특수한 몸짓이나 지침이 의미하는 바를 추측 할 수만 있을 뿐이었다. 명확한 공식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최종 책임 기관에 호소할 가능성이 원리상으로도 없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그런 모호성이 광범위하게 증대 한다.]
[극심한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성이 익숙한 문화적 형태들을 갈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본이 핵심적인 반사 동작을 되풀이하듯 우리도 친숙한 문화적 형태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즉 개인주의의 세계 안에서 모두가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의 상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좌파의 목적은 국가를 넘겨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일반 의지의 종속시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1968년 이후 노동 계급의 욕망을 병합함으로써 승리했다면, 새로운 좌파의 실천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었으나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욕망들에 기반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