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했는데

불이 켜지기 전에

에뷔테른느 2025. 9. 23. 02:13

보는 일에 사로잡힌 그녀의 오프닝 크레딧.
이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시작되겠지. 불이 켜지기 전까지 떠나고 싶지 않은데.,
존재해야 할 핑계가 하나 더 늘었다.
_라디오를 켜면 베티블루 시그널 음악과 함께 이승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올 것만 같은 새벽에.


[극장에 있는 동안만큼은 나를 비우고 타인을 연민하는 일에 가뿐한 부력이 주어졌고, 숏과 숏 사이의 압력으로 멀리 떠밀려가는 동안엔 종전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 었던 인생의 시간이 고개를 내밀고 손짓하곤 했으므로, 극장의 어둠은 한 편의 영화가 수명을 다해 시야가 밝아지고 난 뒤에도 우리 안에 남아 같은 세상을 전보다 가만한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천연두에 걸린 남자, 불빛 속에서 춤추는 스트립 댄서, 굿하는 무당의 펄럭이는 무지개색 옷자락....... 유년의 감각 속에서 색채는 더욱 무서운 탱화풍으로, 멜로디는 호러적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영화에 관객이 스스로 세상과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특별한 추동력이 있다는 점만큼은 신뢰한다. 특히 자신의 감상을 집단의 경험 속에 투영해보고 싶은 욕구는 영화예술이 유독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정서다. 엔딩크레디트 이후에도 이어지는 어떤 불가사의한 관성에 자신을 내맡긴 관객에겐 기분 좋은 행복감이 뒤따른다.]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수많은 관객이 저마다의 망막에 맺힌 각자의 잠재적 이미지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영화 보기의 은밀한 성질이다. 컴퓨터 데이터와 픽셀 차원에서 관객의 육체적 감각과 상호 작용하는 디지털시네마도 이러한 본질로부터는 멀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관객이 된다는 것은, 두 시간 남짓 이어진 초당 스물네 번의 명멸을 어떻게 저마다의 양태로 '오해'했는지 고해성사하는 일로 마무리된다. 동일한 발신자로부터 무한한 수신과 답신이 펼쳐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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