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했는데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에뷔테른느 2025. 5. 25. 07:23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 텍스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일, 미완의 감각, 선에 갇힌 것 같은 느낌, 미치지 않았으면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 거울을 비추는 일, 모든 게 정반대로 뒤집히는, lost in translation. 침묵을 다루는 일에 대하여.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 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단어를, 의미를 고정하는 순간 무수한 틈이 생겨버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 하는가?]

[한국어는 어미와 조사가 발달해서 미묘하고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다.]

[언어의 외피나 형식은 달라졌으나 정신은 유지되었다는 믿음이, 번역 가능성이 증거다.]

[언어를 깨뜨리고 갈기갈기 찢어야, 낡은 은유의 연쇄를 끊어야, 언어가 추상이 아닌 감각으로 느껴질 때에야, 몸이 몸으로 느껴질 때에야 도달할 수 있는 문학성.]

[번역이 창작이 아니라 모방에 불과하며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취급받아왔기 때문에, 그 틈새에 여자들이 침투할 수 있었다.]

[모든 말은 그 안에 침묵을 품고 있다. 번역가가 침묵을 읽 어서 단어들을 엮으며 번역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번역은 이렇게 다르다.]

[번역은 탑이고, 배신이고, 교환이고, 광기이자 광기의 치 료제이고, 길들이기이자 낯설게 하기이고, 조각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고, 빵이자 결핍이고, 틈새이고, 메아리이고, 거울이고, 다시 탑이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번역은 흰 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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